사이토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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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내각은 1932년 5월 26일부터 1934년 7월 8일까지 774일 동안 존속했다. 5·15 사건으로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상황에서,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거국일치 내각을 표방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만주국 승인, 국제 연맹 탈퇴, 적극적인 재정 정책 등이 있었으나, 데이진 사건으로 인한 정권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1934년 7월 8일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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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직 기간
3. 성립 배경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된 후,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이에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사이토 내각은 거국일치를 표방하며,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 양당에서 각료를 등용하였다.[1]
4. 내각 구성
사이토 내각은 1932년 5월 26일에 발족하여 1934년 7월 8일까지 존속하였다.[1] 내각의 각료 구성은 다음과 같다.
내각서기관장은 시바타 젠자부로(1932년 5월 26일 ~ 1933년 3월 13일), 호리키리 젠지로(1933년 3월 13일 ~ 1934년 7월 8일)였다. 법제국 장관은 호리키리 젠지로(1932년 5월 26일 ~ 1933년 3월 13일), 구로사키 테이조(1933년 3월 13일 ~ 1934년 7월 8일)였다.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
참여관은 다음과 같다.
사이토 내각은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의 협력 내각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내각이었다.
4. 1. 국무대신
4. 2.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4. 3. 정무차관
4. 4. 참여관
5. 주요 정책
- 만주 사변 : 1931년 9월 사변 발발 이후, 일본은 현지의 반일 폭동 억제 및 치안 유지 필요성과 국제 여론과의 조율을 위해 노력했다. 국제 연맹의 리턴 조사단에 의한 현지 조사 및 관동군에 의한 현지 치안 유지가 일시적으로 인정되는 등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 내각은 국제 사회와의 협력보다는 일본의 독자적 행동에 무게를 두었다. 1932년 9월 13일, 일만 의정서를 체결하여 만주국을 승인했다.[23] 1933년 1월에는 열하 작전을 개시하여 만주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제 연맹에 대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 국제 연맹 탈퇴 : 1933년 2월 24일, 국제 연맹 총회에서 리턴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즉시 국제 연맹 탈퇴를 선언했다. 이는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6. 내각의 종말
1934년 1월, 지시 신보(무토 야마지 사장)가 섬유 회사인 데이진과 재계인 그룹 "반초회" 및 하토야마 이치로 사이의 뇌물 수수 의혹을 보도하면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데이진 사장, 데이진의 주식을 담보로 한 대만 은행의 총재, 반초회의 나가노 모루, 대장성의 차관·은행국장 등 16명이 기소되었다(데이진 사건).[23]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의 아들까지 의혹이 확산되어 정권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사이토 내각은 1934년 7월 8일 내각 총사퇴했다.[23] 이후 오카다 게이스케 해군대신을 수반으로 하는 오카다 내각이 성립되었다.
1937년, 데이진 사건의 담당 재판관인 이시다 가즈토 등은 피고인 전원에 대해 사건 자체가 사실무근이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당시 사법 대신은 고야마 마쓰키치).
참조
[1]
웹사이트
Saitō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5-26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7-06
[4]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09-14
[5]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4-01-23
[6]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01-09
[7]
문서
貴族院勅選議員勅任
1934-07-03
[8]
문서
帝人事件関与疑惑で引責辞任
[9]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4-03-03
[10]
문서
足利尊氏論の批判により辞任
[11]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4-02-09
[12]
문서
病気療養のため辞任
[13]
간행물
『官報』第1859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03-13
[14]
문서
貴族院勅選議員勅任
1933-12-05
[15]
문서
内閣書記官長に就任するため
[16]
간행물
『官報』第162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6-02
[17]
간행물
『官報』第1891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04-22
[18]
간행물
『官報』第1686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8-12
[19]
간행물
『官報』第1941号「叙任及辞令」
1933-06-22
[20]
간행물
『官報』第1943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06-24
[21]
간행물
『官報』第2094号「彙報 官庁事項 官吏卒去」
1933-12-22
[22]
간행물
『官報』第209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3-12-23
[23]
문서
当時、歴代政権の経済政策の無策によって不況が続いており、失望した世論は軍部への支持に動い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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